두즐님 커미션으로 작업한 잭클입니다.
커미션 내용은
"강화인간의 몸을 얻은 잭과 연인이었으나 죽은 클리브가 환생해 계속 살아있었던 잭과 현대에서 재회한다
(+둘이 입맞췄으면 좋겠다)"
였습니다! 신청해주시고 공개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는 본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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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제일 처음 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이랬다고 말했다.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바닥은 이제 싸움을 위한 도구에서 벗어나, 오로지 상대를 위해 존재했다. 흉터 진 얼굴이라 미안하군. - 누가 들으면 언제는 얼굴 때문에 좋아한 줄 알겠네. 사내의 걱정스러운 말에 돌아온 대꾸는 익살맞은 투였어도 다정함이 발려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머리 하나를 두고 들려왔던 사내의 말이 바짝 붙은 속삭임으로 다가왔다. 사내가 그래왔듯 기대했던 일이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사내의 살짝 벌린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긴장한 숨결, 그 숨을 무심코 고스란히 삼켜버리니 서로 부스스 웃고 말았다. 둘 다 새삼스레 첫사랑을 느끼기라도 하는지, 맞닿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크게 뛰는 게 전해졌다. 무심코 사내의 옷깃을 그러쥐니 그의 손가락이 끼어들어 손을 맞잡아왔다. 사내의 손에는 선물로 줬던, 꽤 오랫동안 낄 날만을 고대해왔던 가죽장갑이 드디어 제 주인 손을 감싸고 있었다. 그래, 우리가 제일 처음 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이랬다. 서로에게 입힐 옷 따위를 선물할 수 있고, 서로를 어루만지고, 이렇게 입 맞출 수 있ㄴ……. 잠깐, 누가? 누가 하고 싶었던 일이라고? 우리?
……내가?
클리브는 장갑을 내던졌다. 떨어진 물건을 주워주려던 친절은 내동댕이쳐져 허공을 붕 날았다. 장갑의 주인이었던 사내는 그 허름하게 벗겨지고 구멍 난 가죽 장갑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다. 무례를 저질렀단 찰나의 아찔함이 아, 하는 탄식으로 변했지만, 지금 체면이나 예의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방금 머리를 뒤흔들고 지나간 영상-내지는 회상- 탓이었다. 클리브는 평소에도 간혹 물건을 통해 남의 사생활을 보곤 했지만, ‘우와! 난 혹시 선택받은 초능력자?’ 같은 우월감이 들 정도로 강렬하고 대단한 능력이 아니었다. 길 가다 남이 떨어트린 물건 한 번 주워준다고 일생을 뒤흔드는 강렬한 경험을 만들어낼 법한 능력이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사생활에 클리브 본인이 있었다. 20여 년 살면서 정말 처음 보는 사람의 인생에 어느 타자의 시점도 아니고 자신이, 낡았지만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그것도 한 몇 년은 마음만 애타게 달아오를 뿐 장거리 연애로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비극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를 극복하고 드디어 만났을 때의 달콤한 재회 같은 뉘앙스가 가득한 기억에! 대체 왜?
클리브가 답지 않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방금 그 회상을 잊어야 할지, 되짚어야 할지 허둥거리는 사이에, 사내는 장갑을 얻어맞은 것보다 엄청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회상에서처럼 얼굴을 가로지르는 비명 같은 흉터가 선명한 사람이었다. 차갑게 굳은 시선이 흔들림 없이 매섭게 클리브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클리브라면 능숙하게 한 꺼풀 벗겨내 사내의 한없이 떨리는 눈빛을 알아챘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평소가 아니었다. 지금 클리브에게 사내의 표정은 그저 대뜸 얻어맞고 어이없어하는 장갑 주인-방금 없던 일인 회상에서 진하게 키스한 사이-에 불과했다.
“너,”
빠르게 스치는 행인들 사이에서 멈춰있던 둘 중 먼저 입을 연 건 사내였다. 묵직한 첫 음이 귀를 두드리는 순간 허둥대던 클리브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꼬투리 잡히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클리브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 활짝 웃으며 슬쩍 몸을 뒤로 빼며 일어났다.
“이야,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주워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요즘 기가 허해서, 하하. 미끄러졌지 뭡니까. 그쪽도 요즘 날씨가 안 좋은데 몸조심하시고, 그럼 이만.”
“잠깐,”
그 잠깐이란 게 사내에겐 있는지 몰라도 클리브에겐 없었다. 클리브는 사내와 귀찮은 방면으로 얽히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인파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아, 출근길은 반대인데, 따위의 생각이 뒤늦게 스쳤지만 지금 뒤돌았다간 장갑 사내-회상 속에서(이하 생략)-와 마주치고 만다. 클리브는 멈추지 않고 계속 뛰었다. 편집장님, 오늘 제게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 말이죠……. 들으셔도 못 믿으실 겁니다. 술김에 필름 끊긴 채로 겪었던 일은 절대 아닌데 만약 들으시면 믿어주실 겁니까? 제 생각엔 아니요. 클리브는 혼란스러운 머리에 애써 다른 걸 채워 넣듯 전할 생각도 없는 시말서를 구구절절 써 내려가며 연어처럼 집으로 거슬러 뛰어갔다.
……남겨진 사내는 얼굴에 맞고 떨어진 가죽장갑을 주웠다. 살아있는 동안 소중히 아끼며, 또 차마 잊을 수 없어 너덜너덜 넝마나 다름없어질 때까지 사용해온 물건이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 장갑을 처음 선물 받은 날 그렇게 다정하게 입 맞췄는데, 장갑을 가졌을 뿐인데 세상을 다 가진 듯 서로를 가졌는데. 지금 그 사람은 이제 없지만……. 아니, 정말 없나? 사내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장갑을 주워준 사람은 잠깐이었지만 분명…….
사내는 장갑을 쥔 채 일어나 클리브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야? 방금 그건 정말 너였어? 길을 이끌어줄 손이 사라져 빈 장갑만 꾹 쥐어왔다. 하지만 방금 다시 만난 거라면? 죽은 게 아니었어? 아니, 죽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너는 누구지?
사내는, 세상과 클리브가 잭이라 불렀던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